본문 바로가기
[ 일상다반사 ]/주저리 주저리

부담스러운 친절

by K. Martin 2006. 11. 29.
출근시간
지하철.

남포동역에서 외국인 5명과, 그들의 가이드 처럼 보이는 두 명이 지하철에 올라탔다.

가이드같아 보이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세일즈맨 같은 복장을 하고 서류봉투 같은 것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트레이닝복 차림에 어딘가 촌스러워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사람, 트레이닝복.

무슨 가이드가 술이 진탕 취해서는,
옆사람들한테 추근덕거리고,
외국사람들보고 코만 뾰족하다면서 핀잔을 주고 그러냐고.

한소리 하고 싶은 마음 꾹꾹 눌러 참으며,
함께 있던 멀쩡한 가이드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서면에서 그 멀쩡한 가이드가 내렸다.
그리고 외국인 5명과 그 술취한 가이드만 남았다.

문제의 가이드는,
영어할 줄 아는 사람을 찾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영어책을 보고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영어좀 해보라면서 툴툴거리고,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큰소리를 버럭버럭 치고 있었다.
그렇게,
갈수록 사태는 심각해지고,
오지랖 넓은 내가 안끼어들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르게 되었다.


살짜기,
외국인에게 저 남자랑 어떤 관계냐고 물어봤다.

놀랍게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남포동 호텔앞에서부터 자기들을 도와준다면서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사태파악이 됐다.
이사람 외국인들 길좀 가르쳐주고 돈이라도 몇 푼 받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한국에 대해 나쁜 인상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어디서 왔는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도 물어보고,
어찌 하다보니 알콜중독자들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게 되었다.

잠시였지만,
작년 한해 영국에서 보낸 시간이 참으로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간에도,
그 술취한 사람의 주정은 계속되었다.
외국인들 딴에는 그 사람을 따돌리려고 해운대로 간다고 거짓말을 했던 모양인데,
그사람은 해운대로 가려면 어디로 가냐는둥, 갈아타야 된다고 이야기 해달라는둥
이사람 저사람을 귀찮게 하고 있었다.

덕분에,
결국,
나는 못참고 큰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저씨, 도와주려는 마음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이렇게 도와주시느니 안도와주시는게 좋겠습니다."


아저씨는 조용히 가만히 있겠다며,
내가 가이드하고 자기는 따라다니게만 해달라고 했다.

"아저씨, 따라가기는 어디를 따라가십니까.
댁이 어디십니까, 지금부터 제가 이사람들 안내 할테니까,
아저씨 일 보십시오.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범어사역에 내려서까지 실갱이를 반복하며,
또 그사람은 지하철 승객들에게 계속 민폐를 끼쳤다.


경찰을 부를까? 지하철 관리사무소에 신고를 할까?
몇 번을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갈등을 했지만,
외국인들에게 물었을 때 그들은 그 남자를 이해하는 듯 보였다.


"도와주려고 하는건줄 아니까 신고는 하지 말아요"


지하철에 내려서는 더 가관이었다.
외국인들은 도와줘서 고마웠다며 끝까지 예의를 지켰고,
그사람은 표도 끊지 않고 지하철을 탔던 탓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외국인과 나를 따라잡지 못해 욕을 퍼부으며 뒤에서 개찰구를 힘겹게 넘고 있었다.


범어사 입구로 나왔다.
내가 범어사를 가본적이 없는 덕에,
또 길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어느새 따라온 술취한 남자는,
같이가야 한다며 나를 계속 나무랐다.

영국에서 왔다는 그 외국인들에게 범어사로 올라가는 버스를 알려주고,
짧은 작별인사를 한 뒤,
나는 그 술취한 사람을 잡고 외국사람들을 버스정류장으로 보냈다.


잠시후,
술취한 남자는 울먹거리며 포기했다는 식으로 나에게 한마디 했다.


"도와주고 싶어서 그런건데, 술이나 한 잔 얻어 마시려고."


"아저씨, 약주 많이 되셨어요. 댁에 가서 쉬셔야죠. 댁이 어디신데요? 차비는 있습니까? 차비 드릴까요?"


차비는 필요 없고,
수고했다며 어깨를 토닥거리는 아저씨.


그리고는 술을 한 잔 하러 가자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애써 뿌리치고 학교로 출근했지만,
어째 그 아저씨의 측은한 마지막 모습이 마음속에 계속 남는다.


그 아저씨가 다시 그 외국인들에게 다가가지 않았길 바라며,
그 아저씨도 집에 잘들어갔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연구실 금정산 산행 中 식후땡




연구실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으며 이 얘기를 연구실 사람들에게 하다가,
문득 2003년도에 영국에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버버리공장에 가던 길이었던가?
철도에서 내려 길을 못찾고 한참을 헤매고 있을 때,
이사람 저사람에게 물어봐도 잘 모르던 그 길을,
어느 노숙자가 마치 한국사람들 가이드를 많이 해봤다는 식으로 친절하게 안내를 해 준 적이 있었다.
너무 자세하게 이갸기해준 덕에 오히려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도움은 우리에게 소중했다.

그리고 2005년도 그리니치 천문대에 올라갔을 때도,
노숙자 한 사람이 와서는 영국의 역사와 그리니치 천문대를 비롯한 주변의 변천사에 대해,
그리고 주변의 건물들에 대해 묻지도 않았는데 주절주절 설명을 해주었다.
물론 그때도,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가 지겹긴 했지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 나처럼,
그리고 내 기억속의 그들처럼,
오늘의 그 외국인들이,
나중에 집으로 돌아간 뒤,
한국 여행에 대해 떠올릴 즈음에,
그 술취한 아저씨가,
친절을 베푼 것에 대해서만 기억하기를.



그리고,
원하지 않는 친절은,
독이 될 수도 있다
는 사실을,
그 아저씨가 알아주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