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킹콩은 암컷이었던 것이다. 작고 연약함이란 모성애를 불러일으킨다. 막 태어난 새끼의 불완전한 모습,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가벼운 어떤 것 앤이라는 존재를 통해 킹콩의 내부에 존재하던 모성애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바로 그 모성애가 킹콩이 앤에게 보이는 집작의 근거가 된다.
유병서
2005년 피터잭슨이 리메이크한 영화 [킹콩]은 할리우드 대작이다. 원래 할리우드 대작이란 스펙타클과 해피엔딩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 해피엔딩이란 ‘승리’와 연결되어 있다. 싸움의 대상이 ‘자연’이든 ‘미개인’이든 ‘유색인종’ 이든, 아니면 ‘여성’이든, 할리우드 영화는 하여간 ‘승리’하게 되어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 [킹콩]은 이런 할리우드 대작 영화의 공식에 약간 어긋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승리’하지만 그 승리하는 것이 왠지 찜찜하기 때문이다. 이 찜찜함은 ‘킹콩’이 암컷이라는 점을 알기 전에는 절대 풀리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쥬라기 공원], [스타쉽 트루퍼스] , [에일리언] 시리즈, [반지의 제왕]등을 한큐에 경험하고 싶다면 답은 여기에 있다. [킹콩]에서의 스펙타클은 지금까지 할리우드에서 이룩한 모든 특수효과를 한 획에 그어 버린다. [킹콩]은 할리우드 관객들에게 익숙한 모든 상상력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킹콩]은 기본적으로 킹콩, 즉 거대한 고릴라에 관한 영화이지만, 그것은 어쩌다 보니 킹콩이었지, 킹콩이외에도 위협적인 ‘자연의 피조물’들은 가득하다. 그것은 ‘공룡’ 들 일수도 있고, 음습한 습지에 사는 ‘갑각류’, 혹은 ‘연체동물’, ‘다지류’ 등 하여간 인간에 비해 압도적으로 거대하다면 반드시 위협적인 모든 것들이다. 여기에서 펼쳐지는 스펙타클은 과도한데, 정도가 좀 지나치다. 인간을 위협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제압/죽음의 대상이다. 게다가 그 배경이 약육강식이 지배법칙으로 작용하는 자연에서라면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 주류 할리우드 문법이란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의 당위성,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승리해야 한다는 할리우드의 전통적 패러다임은 [킹콩]에서도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즐거움’을 인식의 지평이 아닌 존재의 지평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즐거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규범에 따르는 즐거움인 ‘플레지르’이고 다른 하나는 규범을 이탈하는 즐거움인 ‘쥬이상스’ 이다. [킹콩]에서 관찰되는 ‘학살’은 ‘플레지르’의 계열이다.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는 자연의 세계에서 ‘살육’은 그 자체로 규범이다. 문제는 상상력이다. 예를 들어 ‘위기에 빠졌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래서 ‘죽인다’ 라는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키즈리턴]에선 혈투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혈투전의 긴장감을 표현한 한컷, 그리고 피가 낭자한 혈투후의 묘사가 한컷, 그 행간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상상력이다. 그러나 [킹콩]의 전술은 다르다. 그것은 혈투/살육에만 몰두한다. 피 터지는 싸움, 가능한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디테일에 집착하며, 영화에서 구현된 특수효과들을 모조리 동원해 천연덕스럽게 표현한다. 물론 여기에 관객의 상상력이 개입될 여지는 전혀 없다. 그저 스크린 앞에 앉아 팝콘과 탄산음료를 마시며 넋을 놓고 감상하라고 [킹콩]은 노골적으로 주입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고, 죽이고, 또 계속 죽이라 ’라는 영화의 메시지는 ‘플레지르’ 라고 보기에는 너무 비관적이거나 아니면 희극적인 것이다. ‘플레지르’도 끝가지 가면 ‘쥬이상스’가 된다. 이것은 ‘즐거움’이 ‘인식이 대상’이 아닌 ‘존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불난 집 구경하기가 아무리 재미있어도 어느 순간에는 전화기를 들어 119에 전화하거나 물통을 집어 들어야 한다. 재밌다고 계속 구경만 하는 건 인간된 도리가 아니다. 모름지기 부부싸움도 구경하다가 누가 칼을 집어 들면 말려야 하는 것이다.
주목받던 B급 컬트 영화 감독이었던 피터잭슨은 [반지의 제왕] 3부작을 통하여 주류 할리우드 영화계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였다. 그에게 남은 과제란 [반지의 제왕]이 이룩한 상업적 성과를 이어가되, 작가로서의 감독의 어떤 창의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어떤 식으로든 대중의 욕망을 해소 시켜주어야 한다는 주류 할리우드 영화의 당위성은 피터잭슨에게도 유효하다. 주류 할리우드 영화 문법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서부극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중의 욕망을 해소시키는 가장 좋은 방식은 집단의 승리, 즉 인간의 승리이다. 여기서 인간 아닌 자 누구인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어떤 것들과의 싸움에서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이요. 그것이 패배의 연속인 일상의 욕망이 해소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적어도 피터잭슨에게 이 공식은 우롱의 대상인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집요히 매달린다.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하는 사건에서 동기는 소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규범, 즉 플레지르는 날아가고, 일탈의 순간이 엄습하며 따라서 섬뜻하다. 따라서 ‘플레지르’를 ‘쥬이상스’로 재전유하기가 [킹콩]이 보여주는 작가주의적 미덕이다.
[킹콩]은 크게 3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지는 구성을 취한다. 양자역학에서처럼 , 영화에서도 시간과 공간이 종종 같은 개념으로 재현된다. 첫째로 영화 전반부의 뉴욕이다. 이 때의 공간은 문명화된 공간으로 자연의 위협이 부재한 상태다. 칼 덴헴(잭 블랙)은 영화감독이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기록하고자 한다. 여기서 미지의 세계,미스테리란 존재는 하지만 문명의 세계에서 실재하지 않는 , 시간의 개념이 무효한 잠재태 이다. 따라서 칼 (잭 블랙)은 그 미지의 세계에 집요히 매달린다. 따라서 그의 의지는 불순한 것으로 간주되고 제지되어 야 할 어떤 것이다. 용납되지 못하는 존재는 스스로를 가둔다. 그것은 때로는 ‘밀실’이고 때로는 ‘기억’ 혹은 ‘노스텔지아’ 이다. [킹콩]에서는 이 밀실공간/기억(과거의)은 일단 바다를 횡단하는 배로 치환된다. 밖으로 나갈수 없고 일단 출항 후 엔 그 안에 머물러야 하는 밀실공포적인 공간으로서의 배 (벤처호)로 감독은 스스로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감금시킨다. 둘째로 배는 해골 섬이라는 원시의 세계에 도착한다. 이 공간에서 시간개념은 증발한다. 이 얘기는 영화 전반부의 문명화된 시간과 이질적인 것이다. 손목에 시계가 12시를 지시하고 있어도 그것이 이 공간 속에서 의미하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
문명세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은 이 공간은 실재(actual)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virtual)한 공간이요. 문명화 과정에서 소실한 어떤 과거의 기억이 현존하는 노스텔지아(기억)적 상태이다. 여기서 존재는 광장공포증 적이다. 이제 배라는 밀실에서 벗어난 일행은 곳곳에 적들로 둘러쌓인 광장으로 나선다. 서부극에서 나타나는 광대한 자연과 그것의 제압, 그리고 그 필연성이 재현되는 공간이 바로 이 곳에서다. 그리고 그 결과 일행은 [킹콩]이라는 괴수(beast)를 포획하는 데 성공한다.
마지막 세 번째의 공간은 뉴욕이라는 문명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흥미로운 부분은 공간을 홀수(3) 로 구성하였다는 점이다. 짝수의 세계에서는 떠남/돌아옴, 시작/끝 으로 끝나는 명료함이 있다. 하지만 홀수의 세계는 이 보다 연속적이고 복잡하다 .이것은 떠남/돌아옴/다시 떠남의 구성이며. 시작/끝/ 그리고 시작이라는 '영원‘을 담보로 하는 순환 싸이클이다. 그렇다면 킹콩과 돌아온 뉴욕이라는 공간은 어떤 식으로 독해하여야 하는가? 일단 첫 번째 공간과 두 번째 공간에서의 시점은 철저히 인간본위이다. 그것은 모험의 떠나는 인간의 시점에서, 자연을 정복하는 인간의 시점이다. 하지만 세 번째 공간에서의 시점은 킹콩의 시점이다. 이 시점/ 공간에서 뉴욕이라는 문명화된 공간은 마치 자연의 그것처럼 위협적이다. 그리고 영화의 시점은 동일시의 놀이이다. 물론 소격효과와 같이 동일시의 효과를 전복적으로 재전유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네러티브 영화는 동일시에 실패한다면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한다. [킹콩]의 세 번째 공간/시점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일단 [킹콩]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어떤 것이며, 비정상적인 괴수 이다. 하지만 관객들은 자연스레 인간의 시점에서 킹콩이라는 비인간적인 존재의 시점으로 이행한다. 나는 바로 이점이 [킹콩]에서 가장 논란이 될 만한 부분임에 주목하였다. 일단 이 세 번째 공간에서 킹콩이라는 괴수가 공간(space)을 장소(place)로 전유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공간(space)이란 무엇인가? 공간은 어디에나 있는 어떤 잠재적이며 또한 실재하는 총제적인 현실(The Real) 이다. 예를 들어 저 우주 언저리의 어떤 지점은 실제로 가본적은 없더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공간일 것이다. 하지만 장소는 실재하는 공간이다. 예를 들어 ’즐거운 나의 집‘의 경우이다. 장소(place)는 우리게 편안함과 휴식을 제공한다. 밀실공포증/광장공포증에서 나타나는 밀실 속으로의 감금도 사실은 이 공간을 장소로 전유하는 극단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킹콩]에서 공간의 장소화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 가? 첫째 백인 남성적/ 서부극/ 주류 할리우드의 방식이다. 그것은 두 번째 공간 즉, 해골섬 에서의 동일시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확장 중심적이다. 일단 확장을 하고 방해가 된다면 제거한다. 동물의 경우 예를 들어 개(dog)의 경우 소변을 통해 영역을 표시한다. 특히 수컷의 경우 한 다리만 들고 간단히 일을 보는 구조로 발달이 되 있어 확장이 용이하다. 둘째 장소화에 실패한 경우이다. 이것은 첫 번째 공간 (뉴욕)에서 촬영팀이 배에 오르기까지의 서사에서 나타난다. 일단 장소화에 실패하는 존재들은 도피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밀실에 스스로를 감금하거나‘ ’기억/노스텔지어로 도망가기‘ 인데, 여기에선 이 두 가지가 한꺼번에 나타난다. 그들은 배라는 밀실에 스스로를 감금해, 과거의 장소(공룡들과 식인종, 그리고 킹콩이 서식하는 ) 해골섬으로 이동해 간다. 셋째는 장소화가 불가능한 경우이다. 이것은 영화의 세 번째 공간 즉, 킹콩의 시점에서 뉴욕이라는 공간 내에서 구현된다. 영화에서 킹콩은 죽음을 자초한다. 왜냐하면 도시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스스로를 노출시킨다. 고층의 마천루는 아찔하다. 그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편안한 장소이다. 하지만 그것은 장소는 아니다. 그것은 장소가 없는 존재들이 찾아 가는 가장 극단적인 위치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것은 관객이 킹콩이라는 괴수의 시점에 동일시하는 일차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킹콩]은 주지하다시피 RKO의 1933년작 [킹콩]의 리메이크작이다. 그리고 마천루위에서 포효하는 킹콩의 이미지는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세기말적 어떤 이미지 이다.그래서 킹콩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고도의 문명화로 인한 인간소외 현상, 기술발달로 인한 전쟁과 그로 인한 존재들의 소멸에 대한 공포, 리고 장소화가 불가능한 존재의 불안을 재현함은 킹콩이라는 인간이 아닌 킹콩이 라는 이질적인 존재를 통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추락하는 킹콩을 통해 인간들이 상대적인 우월감을 확인하였다고 치자. 그리고 어쩌면 킹콩은 장소 없는 인간의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가상의 존재하고 치자. 하지만 이런 설명들도 상이한 두 시점 (인간의 시점-첫번째 두 번째 공간, 킹콩의 시점-세번째 공간)의 충돌하지 않음을 설명하기 한 부족하다. 먼저 관람 내내 결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짚어보자. 그것은 도대체 왜 킹콩이 앤를 보호하는 점이다. 영화에서 킹콩은 인간을 먹어 치우거나 잔인하게 살해하는 위치에 있다. 그의 보금자리에 수북히 쌓인 해골들이 그것을 반증한다. 그리고 일단 스케일이 다르다. 인간은 킹콩의 손바닥위에서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다. 사랑? 이렇게 스케일이 다른 사랑도 존재 할 수 있을까? 여기엔 몇 가지 함정이 있다. 일단 킹콩이란 극도의 남성성을 구현한 폭력적인 존재라는 의혹이다. 그것은 새디즘적 양상을 띈다. 화가 나면 때려 부시고, 그것으로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 짤막하게 언급하였듯 새디즘은 어디까지나 매저키즘으로 발전하는 과정적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노출증이 스스로를 노출하며 상대방의 노출을 기대하듯이 이러한 새디즘, 즉 정복에의 욕구는 정복 받고자 하는 욕구의 가소로운 표현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가소롭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욕망은 어디까지나 안전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킹콩은 공룡이나 집채만한 바퀴벌레 대신 자신의 손바닥만한 인간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문제는 이 안전한 욕망이 실제로는 안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킹콩이 뉴욕이라는 문명으로 흘러들어와 유랑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점. 그리고 여기서 앤이라는 작고 그리고 귀여운(킹콩의 관점에서는 전혀 예쁘거나 섹스어필하지 않다)존재가 위협적인 어떤 것으로 바뀌어져 버린다는 점이다. 앤을 미끼로 인간들은 킹콩의 포획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전혀 킹콩에게 안전한 것이 아니었다. 킹콩이 클로로포름의 쓴맛을 모르고 권총이나 작살이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 지에 관한 개념이 전혀 없다고 쳐도, 본능으로 먹고 사는 짐승 아닌가? 그런 짐승에게 이런 안전한 욕망이 파괴되는 지점을 목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섹스? 성행위를 담보로 하는 사랑? 그것도 말이 안된다. 무엇보다 스케일이 다른 것이다. 스케일이...
그렇다면 모든 의혹은 여기서 풀린다. 사실 킹콩은 암컷이었던 것이다. 작고 연약함이란 모성애를 불러일으킨다. 막 태어난 새끼의 불완전한 모습,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가벼운 어떤 것 앤이라는 존재를 통해 킹콩의 내부에 존재하던 모성애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바로 그 모성애가 킹콩이 앤에게 보이는 집작의 근거가 된다. 마취에 깨어보니 킹콩은 시/공간을 초월한 결코 장소화 될 수 없는 공간에 놓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집착한다. 어디에? 그것은 노스텔지아/ 기억이다. 바로 이렇게 인접되어 있는 도상들은 관객들을 자연스레 인간의 시점에서 킹콩의 시점으로 이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영화 [킹콩]은 우울하다. 왜냐하면 영화의 마지막 동일시의 대상이었던 킹콩이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현실적이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는다. 물론 우리는 킹콩이 아니다. 하지만 장소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자본은 자유롭고 인간은 묶여 있는/소비자 생산자는 실종되고 유통만 존재하는, 네트워크의 시대의 인간은 끊임없이 유랑한다. 자본이라는 쇠사슬에 묶여 부자연스럽고 그것에서 도망쳐 나와도 갈 곳이라고는 전혀 없다. 결국 기왕 끝이라면 당당하게 끝내겠다는 가소로운 기백만이 신자유주의 시대, 7,000원으로 존재하지 않는 재현의 세계를 감상하는 영화관객들의 옵션일 뿐이다. 따라서 문명/산업화의 상징, 그리고 죽음의 상징으로 기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남은 것은 추락하는 일 뿐이어도, 그것은 결코 선택되어진 것이 아닌, 선택한 결과물 이라는 영화 [킹콩]의 메시지는 킹콩의 모성애가 이룩한 씁쓸한 노스텔지어로 유랑하는 피터잭슨의 할리우드적 악취미의 소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