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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다반사 ]/기타..

[백차승 인터뷰] 미국인들은 그를 코리언이라고 부른다.

여전히 가슴 답답한 사연들을 담고 있음이 분명했지만 백차승은 야구에만 몰두하겠다고 했습니다.



어제(한국시간 10일) 시애틀과 콜로라도의 중계를 들으면서 백차승(27)의 경기를 봤습니다. 나이 등 캐스터가 경기 도중에 ‘이 코리언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제대로 던지는 능력이 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기분이 묘하더군요. 한국에서는 미국인이라고 욕을 먹는데, 여기서는 한국인이라고 불리는 선수.


이제는 빅리그의 투수로 자리를 잡을 준비가 된 것으로 보이는 야구 선수 백차승. 경기 후 클럽하우스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 작년 후반기에 빅리그에 올라가 안정된 모습을 과시했다.
▷ 작년에는 마이너에서 준비를 많이 했었다. 팀에서 짤렸으니까(05년 시즌 끝으로 방출됐다가 마이너리그 계약을 다시 했습니다.) 내가 확실히 만들지 못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상황이었다. (메이저리그에)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목표가 확실하게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 생각하고 정말 열심히 했다.


-당시 큰 경기들에서 인상적인 호투를 했는데.
▷ 8월 말에 빅리그로 호출됐다는 통고를 받았는데 양키스가 첫 상대였다. 우리 팀은 당시 11연패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신중하게 열심히 던지느라 투구수가 많아져 5이닝을 겨우 던졌다. 나는 승리 투수가 되지 못했지만 팀은 승리해 연패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 등판은 보스턴과 3연전 마지막 경기였는데 거기서 승리해 10여년 만에 우리 팀이 레드삭스 상대로 3연전을 모두 승리했다. 바로 다음 경기가 탬파베이 원정으로 원정 12연패를 끊는 승리를 거뒀다.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올 겨울에 팀에서 노장 선발들을 계속 영입해 위치가 불안정한데.
▷ 내게 기회가 올까 했는데 아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수밖에 없다. 아직은 많이 부족한가보다 하고 계속 전진할 뿐이다. 유니폼 입은 선수는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최고의 투수가 되겠다는 목표로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


- 로테이션을 뚫고 들어 갈만한 여지는 보이나.
▷ 객관적으로 보면 없다. 마이너리그 옵션도 아직 한번이 남았다. 작년에도 5선발을 준비하라고 했다가 결국 마이너로 갔다. 그간 팀이 성적이 계속 안 좋았고 감독님과 단장님도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에 베테랑을 선호하는 것 같다.


- 구원 투수는 경험도 별로 없는데.
▷ 그러나 어차피 투수다. 메이저 처음 올라갔을 때도 구원도 했었다. 보직은 어디든 상관이 없다, 중간으로라도 뛸 준비를 하고 있다. 마이너리그에서 선발 뛰는 것보다는 메이저에서 구원 투수로 뛰고 싶다. 투구 코치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감독과 단장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내 준비만 열심히 할 뿐이다.


- 다른 팀에서 기회를 잡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 당연히 있었다. 작년에 팀에서 완전히 짤렸을 때 화도 났었다. 처음엔 마이너 계약도 안하고 완전히 방출하더니 얼마 후에 다시 사인을 하자고 연락이 왔었다. 그래서 다른 팀을 알아보겠다고 했다가 결국은 마땅한 팀이 없어서 돌아왔다.
그러나 여기만 있는 것은 아니고 다른 29개 팀도 있기 때문에 트레이드 될 수도 있고, 마이너로 가서 다시 준비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만이 나의 일이다.


- 마리너스 입단 후 벌써 9년째인데 참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 지난 98년말 계약을 하고 99년에 미국에 왔다. 올 때부터 정말 사연이 많았다. 그리고 3년 이상을 수술과 여러 사정 등으로 공을 던지지 못했다. 미국에 올 때도 비자 인터뷰에서 6번이나 안 되서 99년 봄부터 팀에 합류하려던 계획이 수포가 됐었다. 결국 99년 6월25일에 미국에 왔는데 이미 루키 리그는 다 끝나가고 있었다.


- 수술을 받은 것이 언제였나.
▷ 2001년 이었다. 일단 미국에 와서도 팔꿈치가 아팠다가 안 아팠다가 계속 그러더니 2001년 봄 싱글A에서 게임을 하는데 또 아팠다. 코치가 아픈 것을 알고 쉬라고 했는데 괜찮다고 우겼다. 계속 아픈 것이 반복되니 팀에 면목도 없고 해서 팔이 부러져도 던지겠다는 각오로 마운드에 올랐다. 사실상 수술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던졌다.
그리고 피칭을 하는데 팔꿈치에서 퍽! 소리를 두 번 들었다. 인대가 완전히 없어질 정도였고, 물이 차는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에 4회까지 노히트 게임을 했고 5이닝을 던져 승리 투수가 됐다. ‘사람이 참 마음먹기 나름이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사가 그 팔로 어떻게 공을 던졌느냐고 했다.


- 아무리 정신력이라지만 팔은 완전히 망가지지 않았나.
▷ 던진 다음 날 아침이 되니까 팔이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내 팔이 어디 갔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팔꿈치 인대접합수술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아팠고 운동도 제대로 꾸준히 못하고 해서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너무 부상이 심해 회복하는데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 1년 반 이상의 재활 기간이 결코 쉽지 않았을텐데.
▷ 그때는 솔직히 포기할 생각도 많이 했다. 한국에서 마음먹고 와서 2~3년이면 메이저에 간다고 생각했는데 아예 야구공도 못 잡는 신세가 됐으니.


- 혼자 재활 훈련을 했나.
▷ 바로 여기 피오리아 캠프의 재활군에서 혼자 훈련을 했다. 그래서 시애틀과 함께 이곳 피오리아가 제2의 고행 같은 생각도 든다.


- 그 기간을 혼자서 어떻게 버텼나.
▷ 처음엔 향수병도 걸리고 많이 고생했다. 많이 힘들었다. 야구만을 위해서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도전장을 던졌는데 정말 암담했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했는데 그렇게 되면 야구와는 완전히 이별이었다. 운동이 끝나고 집에 가면 혼자 누워 TV 보다가 천장만 바라보는 생활을 1년 이상 했다.
그때 다행히 여기 사는 같은 또래를 한국 식당에서 만나 친구가 됐다. 그 친구 덕분에 외로움을 떨쳐버리는데 큰 도움이 됐다. 시애틀에서는 이재우 감독님 가족들이라도 있었는데 여기서는 혼자서 정말 외로웠었다. 결국은 야구가 나를 버티게 했다.


-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언제인가.
▷ 수술을 하고 재활 운동을 하는데 J.J. 풋츠(현재 마리너스 마무리)나 애틀랜타로 트레이드된 라파엘 소리아노, 마테오 등 함께 마이너에서 뛰던 동료들이 빅리그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니까 오기가 생겼다. 2003년 나는 다시 싱글A에서 시작해야 했지만 ‘다시 한번 해보겠다. 야구 아니면 내가 뭐를 하겠냐.’ 하며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2003년 봄에 싱글A에서 시작을 했는데 초반에 또 팔이 아파서 DL에 2주쯤 갔다가 다시 복귀해서부터 팔도 안 아프고 공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즌 중반에 더블A로 갔는데 상당히 수준이 있는 리그였는데도 꽤 좋았다. 결국 그 시즌이 끝나고 40인 로스터에 들어갔다.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등에 자신을 얻으면서 백차승은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대체 부상자 명단에 몇 번이나 오르내린 것인가.
▷ 몇 번인지는 모르지만 시애틀 구단 사상 마이너에서 가장 많이 DL에 오른 선수가 나였다고 한다. 트레이너에게 들었는데 내가 DL에 올랐던 것이 거의 500일 가까이 된다고 했다.


- 2004년은 상당히 좋았는데 2005년은 오히려 저조했다.
▷ 2004년 말에 텍사스를 상대로 8이닝 무실점을 하는 등 좋았다. 그런데 2005년 초반 마이너에 갔다가 가벼운 오른팔 부상이 생긴데다 너무 자만했다. DL에 잠시 갔다 온 후에도 ‘이미 빅리그 맛을 봤고 이제 곧 올라간다, 금방 부르겠지.’ 하면서 한 게임 두 게임 망치다가 엉망이 됐다. 당시 메이저 계속 자리가 비어 올라갈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메이저에 한번도 못 올라갔고 8월에 다시 DL에 갔다가 시즌이 끝나면서 아예 방출이 됐다.


- 2006년에는 확 달라진 모습을 보였는데 어떤 변화를 준건가.
▷ 2005년 시즌이 끝나고 7년 만에 한국을 나갔다. 그때 힘이 많이 됐던 것 같다. 처음에는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전까지는 한국의 가족들도 못보고 친구들도 못 만나고....... 그러다가 한국에 가서 모두들 뵙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힘이 솟았다.(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감정이 복받치는 듯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고, 부산에 가서, 내가 자란 학교에 가서 운동도 하고 하니 너무 좋았다. 그래서 독하게 마음먹고 다시 도전하는 계기가 생겼다. 주위에서 잘 하라고 응원해주시는 것들도 너무 감사하고 반가웠다.


- 작년의 시작은 쉽지 않았을 텐데.
▷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고 시작하는데 초청선수로라도 메이저 캠프에 참가하게 해달라니까 자리가 차서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마이너 캠프에서 운동을 하면서 시범 경기 세 번을 던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겨우 받아냈는데 한국에서의 겨울 훈련 덕분에 꽤 잘 던졌다. 당시 메이저에 구원 한자리가 비어서 내게 자리가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더니 결국은 다시 마이너로 갔다.


- 실망하지 않았나.
▷ 그러나 자신이 있었다. 작년에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몸 상태 좋게 아프지 않고 9월까지 뛰었다. 트리플A에서 24번 나가 12승4패에 3.00을 기록한 후에 메이저에 불려갔다. 6게임 선발로 나가 4승1패에 3.67을 기록했다. 한 시즌 동안 30게임에 나가 181.2이닝을 던졌다. 마지막에 삼두근 통증으로 또 DL에 가기는 했지만 보호 차원이었다.


- 지난 겨울 한국에 나가서 어떻게 훈련을 했나.
▷ 재작년에는 한달반 있었는데 이번 겨울에는 3개월간 있었다. 오전에는 고등학교에 가서 후배들과 체력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혼자 체육관에 나가 웨이트 훈련을 했다. 후배들과 러닝도 참 많이 했는데 이제는 못 쫓아가겠더라.(웃음) 공은 조금씩만 던졌다.


- 작년에 빅리그에 승격된 후부터 안정된 피칭을 보인 원동력은 무엇인가.
▷ 왼손 타자들을 상대하기가 수월해 졌다는 것이 큰 힘이다. 그전까지는 사실 약점으로 지적됐는데 작년에 마이너에서 슬라이더로 좌타자의 몸쪽과 바깥쪽을 공략하는 법을 배우면서 자신이 생겼다. 이젠 왼손 타자나 오른손 타자가 피안타율의 차이가 별로 없어졌다. 슬라이더와 체인지업도 좋아지면서 포심, 투심 패스트볼까지 위력이 살아났다.
작년이 야구를 하면서 가장 기분이 좋았던 한 해였다. 그전의 좌절이 너무 크기도 했지만 다시 찾았다는 기쁨도 더욱 컸던 것 같다.


- 부상도 참 많았고 수술까지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외에도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는 것 안다. 그런 일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나.
▷ 내가 할 일은 야구다. 억울하고 속상한 일들도 많았지만 지금은 야구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싶다. 최선을 다해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하겠다.


여기까지가 공식 인터뷰였습니다. 클럽하우스 백차승의 라커 앞에 나란히 앉아 인터뷰를 하다가 여기서 취재 수첩을 덮었습니다. 이미 한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한 시점. 그러나 수첩을 덮고 나서 시작한 이야기는 한 시간 반 동안 계속 이어졌습니다.


어려서 4살 때인가 아버지를 따라 처음 구덕운동장에 갔을 때부터 야구에, 야구장에 빠졌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고등학교 시절인 98년 아시아청소년 선수권대회에 나가서 생겼던 일, 기대에 못 미친 팀 성적과 이어진 ‘무기한 자격 정지.’


18세의 고등학생으로 상벌위원회에 불려나가 억울해서 펑펑 울던 이야기와, 별일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어깨를 두들겨주던 끝에 나온 선수로서의 사형 선고. 더욱 어이없었던 것은 전혀 없었던 일들이 일부에서 기사화되면서 마치 사실처럼 죄로 인정이 됐던 점이라고 백차승은 말했습니다. 소송까지 고려했을 정도로 억울했다고.


그 일 때문인지 미국 비자가 번번이 제동이 걸렸고, 결국 변호사를 구하고 시애틀 구단에서 강력하게 주한 영사관에 항의까지 해서 겨우 받은 3개월짜리 비자. 한국에서는 제명을 당했고, 미국행은 막막하던 그 8개월.


미국에 도착한 후로는 다시 귀국했다가는 발이 묶여 다시는 야구를 못할 것 같던 절박함. 그리고 이어진 팔꿈치 수술과 불투명한 재기와 고되고 외로운 재활 운동 속에 아예 신체검사를 받으러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순간들.


그러나 야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늘 그를 붙잡았고, 결국 임시영주권으로 신분을 유지하다가 2005년에 시민권을 받았습니다. 그 결정의 옳고 그름은 분명히 해석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차승이 처했던 절박함은 그의 결정이 옳고 그름의 논쟁을 떠나 견디기 어렵게 외롭고 처절했음은 분명합니다.


이제 그는 야구 선수로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목표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오로지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만이 그가 지나온 질곡의 세월들을 보상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어서면서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아직도 태극 마크를 꿈 꿀 때가 있느냐고. “누가 뭐래도 저는 한국인입니다. 잘 던지게 되면 WBC 같은 대회라도 혹시 나갈 수 있을까요....... 그치만 이젠 제게 그런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겠지요?”


그러면서 지어보인 그의 웃음이 너무 억지여서 서글픔이 가슴에 솟았습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버린 것인지.......


[민기자닷컴 2007-03-1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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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차승
"차승아 너 롯데가면 나 맨날 응원갈게"
"경모 너 가수되면 내가 팬클럽 할게"
그렇게 서로의 사인을 주고 받았던 순수했던 시절의 친구


으레 우리나라에서 야구부라고 하면
공부는 안하고 운동만 하는 철부지들이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차승이는 운동하는 친구들 속에서는 물론 우리 모두들 사이에서 모범이 되는 친구였다.


커다란 몸을 하고는,
힘들어하는 친구들의 어깨를 두드려 줄 줄도 알고,
피곤한 몸을 하고도 수업시간에 졸지않고 열심히 수업에 열중하는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차승이의 모습이다.


그런 차승이가 먼 곳에서 그 누구보다도, 그 언제보다도 외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더더군다나 억울한 일들로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는 것이,
어쩌면 내 일처럼 마음이 아프다.



사람들아.
미국인이니, 외국인이니 욕만 하지말고,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한 번 쯤은 생각해달라.


그의 판단과 어려서부터 보아온 그의 인간적인 됨됨이를 믿기에,
옳고 그름이라는 해석의 차이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있고 그를 지지한다.


부디, 야구로 성공하여 언론과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 당당히 우리들곁에서 코리안특급이 되어주길 바래!